얀 지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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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얀 지슈카는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보헤미아 출신의 군사 지도자이다. 그는 용병으로 시작하여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후스 전쟁에서 후스파를 이끌고 가톨릭 세력에 맞서 싸웠다. 지슈카는 타보르파를 결성하고, 바겐부르크 전술과 화약 무기를 활용하여 혁신적인 군사 전략을 선보였다. 그는 평생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무패 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체코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군사적, 종교적, 정치적 유산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연구와 대중문화 작품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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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프 홀리는 15세기 보헤미아의 후스파 지도자였으며, 우트라키스트에서 타보르파로 전향하여 얀 지슈카 사후 타보르파를 이끌었고,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 협상했으나 리파니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얀 지슈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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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얀 지슈카 즈 트로츠노바 아 칼리하 |
원어 이름 | Jan Žižka z Trocnova a Kalicha |
별명 | 애꾸눈 지슈카, 성작의 지슈카 |
출생 | 1360년경 |
출생지 | 보헤미아 왕국 보로바니 |
사망 | 1424년 10월 11일 |
사망지 | 보헤미아 왕국 프리비슬라브 근처 지슈코보 폴레 |
매장지 | 흐라데츠크랄로베 성령 대성당 |
로마자 표기 | Jan Žižka z Trocnova a Kalicha |
군사 경력 | |
소속 | 후스파 (1419년-1423년), 타보르파 (1423년-1424년) |
복무 기간 | 1378년경–1424년 |
최종 계급 | 보헤미아 왕국 시종장 |
주요 전투 및 전쟁 | |
참전 전쟁 | 폴란드-리투아니아-독일기사단 전쟁 후스 전쟁 |
주요 전투 | 타넨베르크 전투 (1410년) 네크미르 수도메르 비트코브 고지 비셰흐라드 쿠트나호라 네보비디 도이치브로트 호르지체 말레쇼프 |
기타 정보 | |
칭호 | 칼리흐의 지슈카 |
수여 | 리토메르지체 근처 성, 이 새로운 소유지에 성경 이름을 따서 "칼리흐"(성배)라고 명명 |
웹사이트 | 얀 지슈카 관련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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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얀 지슈카는 후스 전쟁 초기, 뛰어난 군사 지도자로 활약하며 보헤미아 지역 대부분을 후스파가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419년 7월 30일, 얀 졔블리스키가 이끄는 후스파 군중들이 프라하 시청 신청사로 몰려가 감옥에 갇힌 후스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했을 때 지슈카도 이 행렬에 참여했다.[40] 요구가 거절되자 군중들은 시청사에 난입해 시참사회 의원들을 창밖으로 던져 죽였다. 이른바 제1차 프라하 투척사건은 후스 전쟁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바츨라프 4세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17일 만에 사망했다. 이후 후스파는 프라하를 점령하고, 반대 세력들을 모두 추방했다.
1419년 11월 13일, 지기스문트 왕과 프라하 시민들 사이에 일시적인 휴전이 체결되었으나, 지슈카는 이 타협에 반대하여 프라하를 떠나 플젠으로 갔다가, 다시 그곳을 떠났다. 1420년 3월 25일, 수도메르 전투에서 지기스문트의 군대를 격파하며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강경 후스파가 성채를 세우고 웅거하던 타보르로 이동해 타보르파에 합류했다. 타보르파는 민주적 기반 위에 엄격한 군대 기율이 적용되는, 청교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슈카는 이 군사 공동체 조직에 큰 역할을 했고, 군사지도자(hejtman) 중 한 명이 되었다.
후스 전쟁은 후스파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벌인 투쟁으로, 종교적 동기와 함께 사회 문제, 체코인의 민족성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천주교는 얀 후스를 이단으로 판결했고, 후스는 1415년 화형당했다. 바츨라프 4세 사망 후, 지기스문트는 십자군을 발령했다.
지슈카는 바겐부르크 전술과 화약 무기를 활용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격파했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는 군사 지도자였으며, 역사상 드문 불패의 장군 중 하나였다. 독일의 왕이자 헝가리의 왕인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위를 주장하며 침공했고, 지슈카는 이에 맞서 군사 공동체를 구성하고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프라하 시민들은 타보르에 구원을 요청했고, 지슈카는 타보르 군을 이끌고 프라하 방어에 참여했다. 비트코프 언덕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하고, 지기스문트 군대의 포위를 풀었다.
지슈카는 지기스문트 추종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후스파가 보헤미아 대부분을 소유하게 했다. 1421년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의회는 20명의 지도자로 구성된 잠정 정부를 구성했고, 지슈카는 타보르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광신적인 분파의 반란을 진압하고, 리토메리체 근처의 성을 점령하여 '칼리흐의 지슈카'로 서명했다. 1421년, 라비 성 공략 중 한쪽 눈을 잃었으나, 맹인이 된 후에도 타보르 군대를 계속 지휘했다.
1421년 말,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를 재침공하여 쿠트나호라를 점령했다. 지슈카는 기동전을 통해 적의 봉쇄를 뚫고, 네보비디 전투에서 지기스문트 군대를 격파했다(1422년 1월 6일). 지기스문트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1423년, 후스파 내부 분열로 내전이 발생했다. 지슈카는 호르지체에서 양형영성체파 귀족과 프라하 시민들을 격파했다. 제3차 십자군 소식에 휴전했으나, 십자군 격퇴 후 다시 내분이 발생했다. 지슈카는 흐라데츠크랄로베 시민들의 요청으로 양형파 군대를 격파했다.
지슈카는 헝가리를 침공했으나, 수적 열세로 성공하지 못했다. 1424년, 후스파 내분이 다시 발생했고, 지슈카는 스칼리체와 말레쇼프에서 프라하 시민과 양형파 귀족들을 격파했다. 9월, 얀 로키차나의 중재로 화약이 맺어졌다. 재통일된 후스파는 모라바를 공략하기로 했고, 지슈카가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지슈카는 프르지비슬라프성 공략 중 지슈코보폴레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흑사병으로 알려졌으나, 비소 독살설, 세균 감염에 의한 옹종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46]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에 따르면, 지슈카는 자기 가죽으로 독전고를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슈카의 병사들은 그를 존경하여 스스로를 "시로트치"("고아들")라고 불렀다. 사후 프로코프 홀리가 급진 후스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2. 1. 어린 시절
얀 지슈카의 집안은 고향 트로츠노브 마을에 둘 뿐인 마이어호프 집안 중 하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숲 속의 참나무 한 그루 아래서 태어났는데, 참나무 옆으로 마이어호프 소유의 들판과 연못들이 있었다고 한다.[38][2] 지슈카의 집안은 신사 정도에 해당하는 최하급 귀족 제마네(zemanécs)였으나, 귀족으로서 다스릴 봉읍은 거의 없었다. 가족 구성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지슈카에게는 동기가 여럿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남동생 야로슬라프(Jaroslav)와 여동생 아네슈카(Anežka) 둘 뿐이다. 가문의 문장은 가재였다.[38][2]지슈카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1378년 4월 3일자 서류에 “트로츠노브 사람으로 지슈카라고 불리는 얀”(Johannes dictus Zizka de Trocnovla)이 결혼계약의 증인으로 등장한다. 이 사료로 보건대 지슈카는 이 즈음에 이미 성인이었다는 것이고, 역산해서 1360년 정도를 생년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이 계약서류의 얀 지슈카가 우리가 아는 후스파 장군 얀 지슈카와 동일인인지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체코 역사학자 바츨라프 토메크 등은 얀 지슈카가 1378년에 이미 성인이었으면, 1419년 이후 군사령관으로 활약하기에는 너무 늙게 된다면서, 결혼계약서에 증인을 선 사람은 얀 지슈카 장군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주장한다.[38][2][3] 프란티셰크 슈마헬은 얀 지슈카라면 나이 따위가 그 군사적 재능의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라 반박한다.[39][3] 페트르 코르네이(Petr Čornej) 같은 학자는 “지슈카(Žižka)”라는 이름이 얀 지슈카 일족의 다른 누구에게도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없다면서, 이것은 씨명이 아니라 얀 지슈카에게만 부여된 별명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얀 지슈카의 이름은 1378년에서 1384년 사이에 작성된 이런저런 재산문서들에 나타난다. 이는 지슈카가 오랜 기간 재정적 문제로 곤란을 겪었음을 시사한다.[40][4] 1381년, 지슈카는 트로츠노브의 토지 상속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프라하에 등장해 서류에 이름을 남긴다. 이것을 지슈카가 어려서부터 프라하에서 수학했다는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의 『보헤미아의 역사』[41][5] 기록과 어떻게 대조할지는 난감한 문제다. 1384년 문서에서는 “지슈카라고도 하는 요한네스”의 아내 “카테리나(Kateřina)”의 존재가 언급된다.[38][2] 해당 문서는 지슈카가 카테리나의 지참금으로 받은 밭을 팔았다는 내용이다. 이후 지슈카의 이름은 20년 뒤 그가 용병대장이 되어 재출현하기 전까지, 글로 쓰인 사료상에서는 완전히 증발한다.
2. 2. 무법자 생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 인드르지흐 3세 즈 로슘베르카를 비롯한 남부 보헤미아 귀족들은 무능한 왕 바츨라프 4세에 맞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얀 지슈카가 이 반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5세기 초, 얀 지슈카는 가산을 관리하기 시작했지만,[38] 집안 형편이 어려워 토지를 조금씩 팔아야 했다. 일부 기록에는 지슈카의 아버지가 1407년 왕실 사냥터지기로 일하다 사망했다고 나와 있어, 지슈카 역시 왕실에서 일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38]1406년부터 지슈카는 로슘베르카 영지의 『흑색서』(''acta negra maleficorum''la)에 도적 두목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39] 지슈카가 도적이 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드르지흐 3세와 부데요비체, 그리고 그 동맹 도시들에 공공연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을 보면,[38] 가문에 가해진 불의에 맞서 싸우고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슈마헬은 남보헤미아 지역 도적떼 급증의 원인을 로슘베르카 가문(과 교회) 영지의 확장과 더불어, 빚과 가난에 시달린 하급 귀족들이 농민들을 이끌고 도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39] 이러한 상황 때문에 얀 지슈카는 고향 트로츠노프에서 쫓겨나듯 떠나게 되었다. 토메크는 지슈카가 작은 봉토조차 지키지 못하고 쫓겨났을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이는 당시 하급 귀족에게 흔한 일이었다. 결국 지슈카는 무법자 생활을 시작했고, 발코운(Valkoun)이라는 지역 귀족의 부분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 지역에는 폭력 사태가 만연했고, 지슈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들을 공격했다. 이때 지슈카와 손을 잡은 마테이 부드체는 오직 돈만 쫓는 도적이었다. 지슈카의 도적단은 세들로 마을(오늘날 치메르 근처), 롬니체 나드 루슈니치 근처 방앗간, 흘라바트체의 이름 모를 여인의 집, 또는 숲 속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생활했다.[38]
도적들은 보헤미아 남부 도로를 다니는 상인과 여행객을 약탈했다. 주요 수입은 강도, 납치 후 몸값 요구, 마을 공격 등이었다. 이 돈으로 생활비, 정보원 비용, 은신처 사용료를 냈다.[39] 지슈카는 도적 생활 중 최소 한 명을 살해했는데, 피해자는 인드르지흐 3세의 부하였다.[38] 지슈카의 도적단은 인드르지흐 3세의 다른 적들과도 연락을 취했다. 1408년, 지슈카는 프라하티체 근처 후스성 공성 준비에 참여했다(당시 성주 미쿨라스 즈 후시는 훗날 후스 전쟁에서 지슈카의 타보르파 군대 선임 간부가 된다). 그 외 알레슈 즈 비토바, 에르하르트 즈 쿤슈타트 등의 귀족들도 지슈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8]
마테이를 포함한 지슈카 도적단의 상당수는 결국 체포되거나 사망했다.[38] 1409년, 바츨라프 4세가 부데요비체 시와의 분쟁 종결에 합의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바츨라프 4세는 6월 27일 지슈카에게 특별 사면 편지를 보냈고, 부데요비체 시에도 지슈카를 사면하라고 명령했다.[39] 이는 바츨라프 4세가 지슈카를 남보헤미아 분쟁에서 자신의 편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38]
2. 3. 그룬발트 전투 (1410)
폴란드인 얀 드우고시의 연대기에 따르면,[42] 1410년 얀 지슈카는 폴란드-리투아니아-독일기사단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했다. 지슈카는 중세 유럽 최대의 단일 회전 중 하나였던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에서 싸웠던 것으로 생각된다.[43][44] 전투는 1410년 7월 15일에 벌어졌고,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연합군이 독일기사단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으며, 기사단 총장 울리히 폰 융깅겐을 포함해 독일기사단 지도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후 독일기사단은 과중한 전쟁배상금으로 인해 다시는 예전과 같은 위세를 회복할 수 없었다. 드우고시의 기록에 따르면, 지슈카는 전투가 끝난 뒤 라드진 읍락의 수비군으로 근무했다.[14] 이 전투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였다.[15][16] 한쪽 눈이었기 때문에 '독안의 지슈카'라고 불렸다. 몰락한 보헤미아 소귀족 출신이었지만,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여 용병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탄넨베르크 전투)에도 많은 보헤미아 의용군과 함께 폴란드 왕국 편에서 참전했다.2. 4. 프라하 체류 기간
얀 지슈카가 1411년부터 1419년까지 무슨 활동을 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527년 이후 루카슈 프라슈스키(Lukáš Pražský)가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지슈카는 바츨라프 4세의 아내인 조피 왕비의 시종관으로 일했으며, 조피가 얀 후스의 설교에 참석할 때 동행했다고 한다. 얀 후스가 1413년에 체히 남부로 망명한 것을 고려하면, 이 내용은 1411년에서 1412년 사이의 일로 추정된다.[40]지슈카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후스파 역사학자 바리네츠 즈 브레조베(Vavřinec z Březové)는[45] 1419년경 얀 지슈카는 “보헤미아 왕의 가족”(familiaris regis Bohemiaela), 즉 국왕의 가신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16세기에 작성된 연대기들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이다.
1414년 폴란드가 독일기사단에 재침공했다가 실패했는데, 이때 지슈카가 종군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나고 1개월 뒤인 1414년 11월 7일, 프라하의 나 프리코페(Na Příkopě) 거리에 있는 집 한 채를 “외눈의 왕실문지기 야넥”(Janek portulanus regiusla)이 구매했다는 기록이 있다. 체코 역사학계는 대체로 이 “왕실문지기”를 얀 지슈카와 동일인물로 보고 있다. 1416년, “문지기 야넥”은 이 집을 팔고, 구시가지의 좀 더 작은 집을 새로 사서 이사했다.
2. 5. 지도자로 부상하다

1419년 7월 30일, 얀 졔블리스키가 이끄는 후스파 군중들이 프라하 시청 신청사로 몰려가 감옥에 갇힌 후스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지슈카도 이때 행렬에 참여했다.[40] 요구가 거절되자, 군중들은 시청사에 난입해 시참사회 의원들을 창밖으로 던져 죽였다. 이 제1차 프라하 투척사건은 후스 전쟁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바츨라프 4세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17일 만에 사망했다. 이후 후스파는 프라하를 점령하고, 반대 세력들을 모두 추방했다.
1419년 11월 13일, 지기스문트 왕과 프라하 시민들 사이에 일시적인 휴전이 체결되었다. 지슈카는 이 타협에 반대하여 프라하를 떠나 플젠으로 갔다가, 다시 그곳을 떠났다. 1420년 3월 25일, 수도메르 전투에서 지기스문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타보르로 이동해 타보르파에 합류했다. 타보르파는 민주적 기반 위에 엄격한 군대 기율이 적용되는, 청교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슈카는 이 군사 공동체 조직에 큰 역할을 했고, 군사지도자(hejtman) 중 한 명이 되었다.
후스 전쟁은 후스파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벌인 투쟁으로, 종교적 동기와 함께 사회 문제, 체코인의 민족성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천주교는 얀 후스를 이단으로 판결했고, 후스는 1415년 화형당했다. 바츨라프 4세 사망 후, 지기스문트는 십자군을 발령했다.
지슈카는 바겐부르크 전술과 화약 무기를 활용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격파했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는 군사 지도자였으며, 역사상 드문 불패의 장군 중 하나였다. 독일의 왕이자 헝가리의 왕인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위를 주장하며 침공했고, 지슈카는 이에 맞서 군사 공동체를 구성하고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프라하 시민들은 타보르에 구원을 요청했고, 지슈카는 타보르 군을 이끌고 프라하 방어에 참여했다. 비트코프 언덕에서 독일군을 격파하고, 지기스문트 군대의 포위를 풀었다.
지슈카는 지기스문트 추종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후스파가 보헤미아 대부분을 소유하게 했다. 1421년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의회는 20명의 지도자로 구성된 잠정 정부를 구성했고, 지슈카는 타보르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광신적인 분파의 반란을 진압하고, 리토멀리스 근처의 성을 점령하여 '칼리스의 지슈카'로 서명했다. 1421년, 라비 성 공략 중 한쪽 눈을 잃었으나, 맹인이 된 후에도 타보르 군대를 지휘했다.
1421년 말,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를 재침공하여 쿠트나호라를 점령했다. 지슈카는 기동전을 통해 적의 봉쇄를 뚫고, 네보비디 마을에서 지기스문트 군대를 격파했다(1422년 1월 6일). 지기스문트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1423년, 후스파 내부 분열로 내전이 발생했다. 지슈카는 호리체에서 양형영성체파 귀족과 프라하 시민들을 격파했다. 제3차 십자군 소식에 휴전했으나, 십자군 격퇴 후 다시 내분이 발생했다. 지슈카는 흐라덱크랄로베 시민들의 요청으로 양형파 군대를 격파했다.
지슈카는 헝가리를 침공했으나, 수적 열세로 성공하지 못했다. 1424년, 후스파 내분이 다시 발생했고, 지슈카는 스칼리체와 말레소브에서 프라하 시민과 양형파 귀족들을 격파했다. 9월, 얀 로키차나의 중재로 화약이 맺어졌다. 재통일된 후스파는 모라바를 공략하기로 했고, 지슈카가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지슈카는 프리비슬라브성 공략 중 지슈코보폴레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흑사병으로 알려졌으나, 비소 독살설, 세균 감염에 의한 옹종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46]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에 따르면, 지슈카는 자기 가죽으로 독전고를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슈카의 병사들은 그를 존경하여 스스로를 "시로트치"("고아들")라고 불렀다. 사후 프로코프 홀리가 급진 후스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2. 5. 1. 바겐부르크 전술
얀 지슈카는 바겐부르크 전술 발달에 기여했다. 바겐부르크는 체코어로 보조바흐라드바(vozová hradbacs)라고 불리는 기동 요새였다. 후스파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을 맞아, 전투용으로 개조한 수레를 사각형 또는 원형으로 배치했다. 수레의 바퀴는 사슬로 묶었고, 이 수레벽 앞에 참호를 팠다. 수레 한 대당 16-22명의 병사가 탑승했는데,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후스파의 전투는 크게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 제1단계 (방어전): 후스파는 적군 가까이 수레진을 배치하고, 포격으로 적들을 자극해 전투로 끌어냈다. 대포는 근거리에서 특히 많은 사상자를 냈다. 더 이상의 손실을 견딜 수 없어진 십자군 기사들이 돌격해 오면, 수레 안에 숨어 있던 총통수와 쇠뇌수들이 사격을 가해서 적을 약화시켰다. 사격수들은 기사보다 말을 먼저 겨냥해서 기병의 이점을 빼앗았다. 많은 기사들이 말이 쓰러지면서 낙마해서 죽었다.
# 제2단계 (공세적 반격): 적의 사기가 꺾이면 곧바로 공세적 반격이 시작되었다. 수레진 측면에 틈을 열고 수레진 가운데서 대기하던 보병과 기병들이 쏟아져나갔다. 수레진 전면에서 사격과 포격을 당하는 사이 측면에서 예비대가 쳐들어오면 십자군은 속수무책이었고, 무거운 갑옷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는 기사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적군은 큰 손실을 입었고, 후스파는 포로를 잡지 않는다는 평판을 얻었다.
지슈카는 이 전술을 통해, 마스케트총과 장갑마차(전투마차) (Tabor) 등의 신무기를 적극 활용하여 신성 로마 제국군과 십자군을 여러 번 격파했다.
2. 5. 2. 화약 무기
후스 전쟁은 전장에서 피스톨이 최초로 성공적으로 사용된 사례였으며, 얀 지슈카는 화약 사용의 혁신가였다. 그는 마차 사이에 중형 대포를 장착한 마차를 이용하여 전장을 이동한 최초의 유럽 사령관이었다.[20] 체코인들은 권총을 ''píšťala''라고 불렀고, 보병 대응 야포를 ''houfnice''라고 불렀는데, 이는 영어 단어 "pistol"과 "howitzer"의 어원이 되었다. 독일인들은 화약을 과립화하기 시작하여 소형 전술 무기에 사용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었다. 단발식 무기만으로 무장하고 총검이 없는 야전의 권총 사수는 기마 기사의 돌격에 대적할 수 없었지만, 성벽 뒤나 바겐부르크 안에서 집중되고 훈련된 총 사수들은 권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룬발트 전투에서의 경험을 통해 지슈카는 적의 공격 방식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자신의 병력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물리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마스케트총 - 당시 화약병기로는 대포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지만, 휴대 가능한 총기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단순한 것이 개발되어 실전에 이용되었다. "피스타라"(Pistala, 체코어로 "피리"를 의미함)라고도 불리며, 피스톨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 Piszczał|de|Handrohr|en|Hand cannonpl
- 장갑마차(전투마차)(Tabor) - "바겐부르크"라고도 불린다(직역하면 "마차 요새"). 말이 끄는 농업용 마차의 차체 상하에 두꺼운 판으로 만든 총안이 있는 가슴벽을 설치하고, 전투 시에는 고리 모양으로 연결하여 간이 요새로 만들었다.
2. 6. 신출귀몰 전략가

얀 지슈카는 후스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가로 이름을 알렸다. 1419년 제1차 프라하 투척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후스 전쟁에서, 지슈카는 후스파 군대를 이끌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 맞서 싸웠다.[40]
지슈카는 농민과 소작농으로 구성된 군대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농기구를 전쟁 도구로 개조하는 등 실용적인 전략을 사용했다. 또한, 타보르에 모인 후스파 중 급진파인 타보르파를 결성하여 신앙에 기반한 엄격한 군율과 신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1420년 수도메르 전투에서 지기스문트의 군대를 격파하며 첫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비트코프 언덕 전투에서 십자군을 물리치는 등 연승을 거두었다. 지슈카는 지기스문트의 추종자들과의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여 후스파가 보헤미아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지슈카는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 대공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며, 1421년 차슬라프에서 열린 회의에서 20명의 지도자로 구성된 임시 정부 구성에 참여하여 타보르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광신적인 분파인 아다미테파의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 가톨릭 신자와 지기스문트 추종자들에 대한 전투를 계속했다. 라비 성 공략 중 한쪽 눈을 잃었지만, 맹인이 된 후에도 타보르 군대를 계속 지휘했다.
2. 6. 1. 제1차 후스파 토벌 십자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헝가리의 국왕이었으나, 보헤미아의 국왕은 명목상의 지위였다.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보헤미아가 세습 왕국인지 선거 왕국인지에 대한 논쟁은 당시에도 계속되었고(훨씬 후까지도 지속됨) 특히 지기스문트가 왕위를 계승하려 했던 계보가 보헤미아 왕국이 귀족들이 선출하는 선거 왕국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왕국의 섭정(체네크 폰 바르텐베르크)도 지기스문트가 선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기스문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로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신봉자인 지기스문트는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지원을 얻는 데 성공했고, 마르티노 5세는 1420년 3월 17일, 보헤미아에서 "위클리프파, 후스파와 다른 모든 이단들을 제거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하는 교황령을 발표했다.1420년 6월 30일, 지기스문트와 많은 독일 제후들은 유럽 전역에서 온 대규모 십자군 군대를 이끌고 프라하 성벽 앞에 도착했다. 이 군대는 주로 약탈의 가능성에 이끌린 모험가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즉시 도시 포위 공격을 시작했고, 얀 지슈카는 왕국을 방어해야 했다. 그는 실용적인 군사 전략을 개발했다. 그의 군대는 농민과 소작농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형적인 기병과 갑옷을 착용한 군인처럼 자금과 장비가 부족했으므로, 지슈카는 농민들의 기술을 활용하여 군사 효율성을 높였다. 그는 농기구를 전쟁 도구로 개조했다. 농업용 도리깨는 전쟁 도구로 변형되었다.
지기스문트의 위협에 직면한 프라하 시민들은 타보르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지슈카와 다른 지휘관들이 이끄는 타보르파는 수도 방어에 참여하기 위해 출격했다. 프라하에서 지슈카와 그의 부대는 프라하의 지역인 지슈코프에 있는 비트코프 언덕으로 알려진 도시 외곽 언덕에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했다. 7월 14일, 지기스문트의 군대가 총공격을 가했다. 후스파와의 통신을 확보한 요새인 비트코프 언덕에 강력한 독일 십자군이 공격을 감행했다. 지슈카의 지휘 덕분에 공격은 격퇴되었고, 지기스문트의 군대는 포위 공격을 포기했다. 8월 22일, 타보르파는 프라하를 떠나 타보르로 돌아갔다.
2. 6. 2. 제2차 후스파 토벌 십자군
1421년 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를 다시 정복하려 시도하여 쿠트나호라를 점령했다. 주로 독일인 시민들로 이루어진 도시 주민들은 도시 내의 후스파들을 몇 명 살해하고, 도시 밖에 진을 친 지슈카의 군대의 진입을 막았다. 지기스문트의 군대가 도착하여 후스파들을 포위했다. 타보르와 프라하의 연합군을 이끌던 지슈카는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역사가들이 최초의 이동식 포병 기동이라고 부르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지슈카는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콜린으로 후퇴했지만, 증원군을 받은 후 콜린과 쿠트나호라 사이 네보비디 마을에서 지기스문트의 방심한 군대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1422년 1월 6일). 지기스문트는 1만 2천 명의 병력을 잃고 자신만이 간신히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기스문트의 군대는 1월 10일 네메츠키 브로드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지만, 도시는 체코군에 함락되었고, 지슈카의 명령과는 달리 방어군은 모두 학살당했다.2. 7. 전설이 된 무패장군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의 연대기에 따르면, 얀 지슈카는 죽기 전 자신의 가죽으로 독전고를 만들어 사후에도 군대를 이끌게 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지슈카를 존경했던 병사들은 그가 죽자 스스로를 “시로트치”(고아들)라고 불렀다. 지슈카의 적들은 “필멸자의 손으로는 파괴될 수 없는 자의 목숨은 신의 손으로써만 거두어졌다”고 말했다.[46]지슈카 사후, 프로코프 홀리가 급진 후스파의 지도자 역할을 계승했다.
3. 유산 및 평가
얀 지슈카는 체코 문화와 종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그의 실제 활동에 대해 역사 연구가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얀 지슈카가 자기 방어와 교회 개혁을 위해 싸운 현명한 지도자로만 여겨져서는 안 되며, 신의 이름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살상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교회와 마을을 불태워 체코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파괴한 인물로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의 적들이 단 한 사람도 살려주지 않은 것에 비해, 지슈카는 종종 어린아이와 여자만은 살려주었다는 점은 참작해야 한다.[1]
이러한 의견은 극단적인 생각으로 여겨진다. 장군으로서 지슈카는 보헤미아를 노리는 십자군에 맞서 싸워야 했고, 나라와 국민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때때로 자비심을 보이기도 했으며, 네메츠키 브로드에서 군대가 불복종하는 태도를 보이자 전군에 신에게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게 했다. 또한 꼼꼼한 법률을 제정하여 자신을 포함한 전군에 적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지슈카가 단순한 피에 굶주린 전사가 아니라 사려 깊은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1]
얀 지슈카는 검의 사람으로서 신의 사람인 얀 후스의 반대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후스 전쟁을 다룬 오타카르 바브레의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체코의 국가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연결된다.[1]
3. 1. 군사적 유산
얀 지슈카는 체코의 문화와 종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역사 연구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자기 방어와 교회 개혁을 위해 싸운 현명한 지도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신의 이름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살상하고, 교회와 마을을 파괴하여 체코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파괴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적들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지만, 지슈카는 종종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살려주기도 했다.[1]이러한 평가는 극단적인 면도 있다. 장군으로서 지슈카는 보헤미아를 노리는 십자군에 맞서 싸워야 했고, 나라와 국민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때때로 자비심을 보이기도 했으며, 네메르키 브로드에서는 군대가 불복종하는 태도를 보이자 전군에 신에게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게 했다. 또한, 꼼꼼한 법률을 제정하여 자신을 포함한 전군에 적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지슈카가 단순한 피에 굶주린 전사가 아니라 사려 깊은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1]
얀 지슈카는 검의 사람으로서 신의 사람인 얀 후스의 반대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후스 전쟁을 다룬 오타카르 바브레의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체코의 국가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연결된다.[1]
한쪽 눈이었기 때문에 '독안의 지슈카'라고 불렸던 그는 몰락한 보헤미아 소귀족 출신이었지만,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여 용병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탄넨베르크 전투)에 보헤미아 의용군으로 참가하여 폴란드 왕국 편에서 싸웠다.[1]
이후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의 군사 고문이 되었고, 프라하에서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 얀 후스의 사상에 심취했다. 1415년 후스가 화형당하자 후스파를 이끌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 대항하여 후스 전쟁을 일으켰다.[1]
1420년, 타보르를 건설하고 타보르파를 결성했다. 타보르파 군대는 엄격한 군율과 머스킷총, 전차 등의 신무기를 바탕으로 신성 로마 제국군과 십자군을 여러 번 격파했다. 후스파 내부에는 다양한 그룹이 혼재했기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지슈카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여러 파벌을 통솔했다. 1424년에는 온건파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모든 후스파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같은 해 페스트로 사망했다.[1]
지슈카를 따르던 후스파 병사들은 자신들을 "고아"라고 칭하며 그의 전술을 계승하여 후스 전쟁을 계속 싸웠다.[1]
3. 2. 종교적, 정치적 유산
얀 지슈카는 체코의 문화와 종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그의 실제 활동에 대해 역사 연구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지슈카를 자기 방어와 교회 개혁을 위해 싸운 현명한 지도자로만 보아서는 안 되며, 신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고, 교회와 마을을 파괴하여 체코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파괴한 인물로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지슈카가 때때로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살려주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적들이 자비를 보이지 않았던 것에 비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는 점을 간과한 극단적인 견해로 여겨진다.[1]그러나 지슈카는 단순한 피에 굶주린 전사가 아니라, 사려 깊은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네메츠키 브로드에서 그의 군대가 불복종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 지슈카는 전군에 신에게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게 하고, 꼼꼼한 법률을 제정하여 자신을 포함한 전군에 적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지슈카가 검의 사람으로서 신의 사람인 얀 후스의 반대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후스 전쟁을 다룬 오타카르 바브레의 서사 영화에서 두 사람은 체코의 국가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연결된다.[1]
한쪽 눈이 멀었기 때문에 '독안의 지슈카'라고 불렸던 그는, 몰락한 보헤미아 소귀족 출신이었지만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여 용병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탄넨베르크 전투)에 보헤미아 의용군으로 참가하여 폴란드 왕국 편에서 싸웠다.[1]
그 후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의 군사 고문이 되었고, 프라하에서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 얀 후스의 사상에 심취했다. 1415년 후스가 이단으로 화형당하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느낀 후스파를 이끌고 가톨릭 세력을 공격했다. 1419년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바츨라프 4세 사후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자 이에 저항하여 후스 전쟁을 일으켰다. 1420년, 박해를 피해 온 후스파 민중을 보헤미아 남부 산악 지대에 모아 성채 도시 타보르를 건설하고, 후스파 중에서도 급진파인 타보르파를 결성했다. 지슈카가 이끈 타보르파 군대는 신앙에 기반한 엄격한 군율과 머스킷총, 전차 등의 신무기를 바탕으로 신성 로마 제국군과 십자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1]
후스파 내부에는 성서 원리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아담파와 같은 과격한 급진파부터 가톨릭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부유층 중심의 온건파까지 다양한 그룹이 혼재했다. 지슈카는 1423년 타보르파와 거리를 두고 오레브파를 결성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여러 파벌을 통솔했다. 1424년에는 온건파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모든 후스파의 사실상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모라비아 원정 중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1]
지슈카를 따르던 후스파 병사들은 자신들을 "고아"라고 칭하며 지슈카의 전술을 계승하여 후스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1]
3. 3. 대중문화
얀 지슈카는 여러 대중 매체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뤄진다.- 문학:
- 조르주 상드의 소설, 마이스너의 독일 서사시, 알로이스 지라섹의 보헤미아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 데이비드 B의 그래픽 노벨 ''무장한 정원''(''무장한 정원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이다.[22]
- 오니시 코이치의 만화 ''乙女戦争 ディーヴチー・ヴァールカ|소녀전쟁 디브치 발르카일본어''(2013)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35]
- 영화:
- 오타카르 바브라 감독의 "후스 전쟁 3부작" (얀 후스, 얀 지슈카, 모든 것에 맞서)에서 즈데네크 슈테파네크가 지슈카 역을 맡았다.[23][24]
- 1960년 폴란드 영화 『튜턴 기사단』에서 타데우시 슈미트가 지슈카 역을 연기했다.
-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영화 『나 지슈코베 발레치넘 보제』에서 일리아 프라하르가 지슈카 역을 맡았다.[25]
- 2013년 애니메이션 영화 『후스파』에서 지슈카에 해당하는 인물로 자보이가 등장한다.[26]
- 2022년 영화 『얀 지슈카』(영어 제목: Medieval)에서 벤 포스터가 지슈카 역을 맡았다.[27][28]
- 오니시 코우이치의 만화 『소녀전쟁 디브치 발르카』는 후스 전쟁을 소재로 후스파의 시점에서 그려졌으며, 지슈카가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 게임: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스 II: 디피니티브 에디션 - 듀크의 여명''에 얀 지슈카 싱글 플레이어 캠페인이 있다.[29]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스 III'' 독일군 유닛 후스파 전차 정보창에 존 지즈카(John Zizka)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언급된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II''에서 보헤미아 진영의 기본 장군으로 등장한다.
- ''필드 오브 글로리 II: 중세''에 얀 지슈카 후스파 캠페인이 있다.[30]
- ''송스 오브 더 챌리스''의 주인공이다.[31][32]
- ''ROK (라이즈 오브 킹덤즈)''의 전설적인 기병 사령관 중 한 명이다.
- ''흐로트''에 찰라프의 해골(Calvaria of Čáslav)이라는 파워업이 등장한다.
- ''쓰루 더 에이지스: 어 뉴 스토리 오브 시빌라이제이션'' 확장팩 ''뉴 리더스 앤 원더스''의 [1시대] 지도자이다.
- ''1428: 실레지아의 그림자'' DLC ''투르니 앳 더 베어 록''에 등장한다.[33]
- ''킹덤 컴: 딜리버런스 II''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 기타:
- 1917년 러시아 주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제3 체코슬로바키아 소총 연대는 "얀 지슈카 즈 트로츠노바"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34]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얀 지슈카 제1 체코슬로바키아 파르티잔 여단을 비롯한 여러 군사 부대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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